제목 | 지혜를 완성하는 자비 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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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01-19 |
불교는 반야지혜만 성취하면 자비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늘 법문하고 강조를 합니다.
제가 지난번 대만의 법고산사에 가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이, 거기는 불교대학과 승가대학이 있어 스님과 재가자들이 같이 공부하는, 잘 갖춰진 교육기관입니다. 그래서 학승들이 많이 있고, 간화선과 묵조선을 마스터로서 전승받은 주지 스님이 그 프로그램을 다 같이 하고 있더군요. 물론 따로 일주일씩 용맹정진 기간을 정해, 묵조선 필요한 사람은 묵조선 방법으로 간화선 필요한 사람은 간화선 방법으로 지도를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 수행과 함께 정말 강조하고 있는 게 뭔가 살펴보니 ‘자비’예요. 마침 제가 간 동안 연중 가장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타이틀이 자비(compassion)입니다. 1년 동안 그 큰 행사를 통해 자비심을 고취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놨고, 학교 교훈을 보니 지혜를 먼저 쓰지 않고 비(悲, 연민심) -여기 자(慈)가 포함 -를 먼저 쓰고 그다음에 지(智), 경(敬) 자비지경. 보통은 학자나 수행자들이 지혜를 먼저 쓰고 그걸 먼저 강조하는데 그곳에선 반대로 쓰고 있어서, ’앗, 내가 생각하는 발상을 실천하는 분이 있구나!‘ 하고 환희심이 났습니다.
선불교 선사들은 예를 들어, 밥 달라고 배고파 하며 동냥 그릇을 갖고 왔는데 밥그릇을 뺏어 밥을 안 주는 게 자비예요, 선사는. 물속에서 막 “살려주세요!” 하며 허우적거리는데 머리를 더 처박아 저 혼자 살아나오도록 하는 게 자비입니다. 이게 선불교에서 쓰는 대기대용의 자비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이대로 쓰면 도망갈까요, 있을까요? 이런 측면을 어록이나 실제 선사들이 쓰는 것들을 잘 끄집어내 살려내고 그렇지만 선사들도 이젠 이 시대에 맞는 방편 써야 하는 시대에 오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자애미소명상을 이야기하려고요. 어때요, 조금 속이 보이나요?
선불교의 온전함, 우리는 다 지혜로 충만하고 자비 무궁한 존재라는 큰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서 자애미소명상을 할 수 있도록, 접근은 아주 쉽지만 일단 해서 깊이 들어가면 깨달음까지도 같이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자애미소명상을 구성해놨습니다.
오늘은 화엄경 중 ‘보현행원품’의 구절을 읽겠습니다. 보현보살의 10가지 행원을 통해 자비를 실천, 지혜를 실현하겠다는 큰 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쳐주며
어두운 밤중엔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겐 보배를 얻게 함으로써
일체 중생이 평등하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일체 중생을 수순하면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고 공양하는 것이며
중생을 받들어 섬기면 여래를 받들어 섬기는 것이고
중생을 환희심 나게 하면 곧 모든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자비심을 본체로 삼기 때문에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보리심을 발하며, 보리심으로 등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넓은 모래밭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뿌리가 물을 빨아들여 줄기나 꽃 열매를 무성하게 하는 것처럼, 생사광야의 보리수 왕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 중생을 나무뿌리로 삼고 여러 불보살을 꽃과 열매로 삼으며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면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보살들이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등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리는 중생에 속한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이 보현행원품은 이렇게 중생을 향한 행을 발원하고 그 발원을 실천해가는 것입니다. ‘항순중생원(恒順衆生願)’ 여기서 ‘일체 중생을 수순하면 모든 부처님을 수순 공양하는 것이며... 중생을 환희심 나게 하면 모든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그 다음에 '부처님은 자비심을 본체로 삼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보리심을 발하며 보리심으로 등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완전히 깨치고 나니 “아!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연기적 현상으로서 존재가 있는 것이지 연기적 현상 아닌, 독자적으로 분리된 삶과 존재는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게 확연히 드러난 거예요. 그러기에 서로 따스함과 친절함을 나누는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 지혜가 있음과 동시에 그러니까 마음을 쓰고 말을 하고 행위할 때 늘 따스함과 친절함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아신 거죠. 그래서 자비심을 본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보리심을 발한다.’ 깨닫고 보니 비로소 자비심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자비심을 바탕으로 보리심을 일으켜야 진정한 발심입니다. 그러면 정진해야 되겠죠. 그 정진이 반야 지혜를 나게 하는 정진일지라도 그 밑바탕에는 항상 자비심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보리심으로 등정각(等正覺), 아눗다라 = 안+웃다라 = 위없는(無上), 삼먁 =바른(正), 삼보리(三菩堤)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는 거죠. 어떻게? 자비심을 바탕으로 보리심을 증장하여 계속 보살 수행을 하면 결국 등정각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중생을 수순하고 받들고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 보현보살은 그렇게 실천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실천하라고 이런 법문을 해주신 것입니다.
보현행원품을 읽을 때마다 후렴구가 매력적입니다. 어마어마한 원입니다. ‘중생의 뜻에 따라 수순함‘이라는 행위를 허공계가 다하고 -허공계는 다하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중생계가 다하고 -이것 또한 묘연한 일이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 수순하는 마음은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나의 서원을 생각생각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의 한 생각을 5분, 10분 이어지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수행은 어마어마한 서원을 세우고 어마어마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구체적인 것,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생각생각 끊어지지 않게, 말하는 자신을 늘 살피고, 무수한 생각을 일으키는 자신을 늘 살펴보며 행동할 때, 행동하는 자기 모습을 다시 보는 이 마음이 바로 정념정지, 즉시현금, 지금 여기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불교수행의 핵심이예요. 어마어마한 수행도 거기서 시작합니다. 그걸 놓치면 수행이 이뤄지지 않아요.
오늘은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항순중생원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고, 지혜를 증장시키는 게 보리심이라면 그 근저엔 자비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는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입니다. 손등이 제 역할을 하려면 손바닥이 자꾸 움직여줘야 해요 손등으로는 잡을 수 없고 손바닥으로 잡을 수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이뤄졌을 때 “지혜 충만, 자비무궁, 속성정각(속히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광도중생(널리 많은 중생들을 제도 하겠습니다)”이것이 축원에서 하는 발원입니다.
- 미산스님, 상도선원 자애미소명상법회 법문(2015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