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비심의 실천, 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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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01-19 |
불교에서 자비는 지혜하고 짝을 이룬다는 것은 불자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비가 보시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을 여러분께 읽어 드릴 테니 들으면서 음미해 보시고 그런 뒤 이와 관련된 말씀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한다. 병든 중생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대하듯 가엷게 여겨 보살펴 주고, 즐거워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다 나은 것을 보듯 기뻐하고 보시한 뒤에서는 다 큰 자식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듯이 해야 한다.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할 때는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 한다.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이 모든 중생들이 함께 큰 지혜의 음식을 얻으리라. 바라건대 중생들의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삼고 애욕의 음식을 찾지 말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지혜를 완성하여 걸림 없이 착한 일을 성취 할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 허공과 같이 걸림 없는 몸을 얻을 지어다. 바라건대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일으켜 복밭이 되어 지이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이루면 한량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모든 선행을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선한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은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 부처님 이니라”
대승 열반경의 범행 품에 나오는 ‘자비심이 곧 여래이다’ 라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이 대승경전에서 보살은 보디사트바, 보디는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사트바는 중생, 즉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생명체 인가. 깨달음을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해 가는 생명체. 인간 뿐 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계에서, 그러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 또한 보살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심으로 가득 찬 보살님을 관세음보살, 세상의 고통스러운 음성을 관觀해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케 해주는 대표적인 자비의 상징인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죠.
보현보살은 그러한 것들을 행으로 옮겨서 중생들을 자비로서 섭수해주는 보살이고, 그리고 앞서서 불교에서 자비는 지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런 지혜의 상징은 문수보살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지혜의 칼을 늘 옆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는 날카롭습니다. 날이 항상 서있어서 어떠한 것이 와도 가차 없이 베어서 무명 처를 머물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관음보살의 따뜻하고 훈훈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자비의 힘이 있기 때문에 지혜가 균형을 잡아서 조화롭게 되어서 모든 것들이 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의 온전함을 내가 몸으로 체득해서 지혜를 완성하고, 그 지혜를 완성함과 동시에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서 헤매이는 존재들을 자비의 마음으로 섭수해서 인도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보살은 보디사트바, 왼손으로는 깨달음을 향해서 끈임 없이 정진하고 오른손으로는 중생들을 동시에 제도하는 분들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역할입니다.
보살행의 첫 번째 조건은 잘 베푸는 것, 나누는 것, 보시를 하는 것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은 찰라 찰라의 점들이 연결이 돼서 하나의 시간이 인식이 되고 공간이 인식이 되면서 ‘내가 있다’라는 환상에 젖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곡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왜곡하며 사는 삶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어요. 그런데 보살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지혜와 자비가 발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보살행을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보살행의 첫 번째 조건은 잘 베푸는 것, 나누는 것,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사찰이 부자고 잘살기 위해서 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 본분의 입장에서 보시야 말로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육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을 잘하게 되면 공성을 깨닫고 진정한 깨달음인 정등각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시를 제대로 하려면 아상, 왜곡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게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향해서 가다보면 어느 날 그러한 보시가 지혜와 자비와 연결 돼서 가능하게 됩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면 접근을 못합니다. 어떤 분이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언니의 소개로 자애미소명상을 하셨는데 그분은 여태까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애미소명상 끝에 울면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고 명상 중에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분들 찾아서 작은 선물이라도 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 보시.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할 때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모든 중생이 큰 지혜의 음식을 얻어집니다. 바라건대 중생들이 맛있는 음식을 찾고, 애욕을 음식을 찾지 말지어다.’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수행처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 먹는 순간 입에서 에너지가 돌아요. 제가 이런 경험을 한 곳이 고엥까 센터에요. 거기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해서 공양 간에 가서 음식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검증된 사람만 들어갑니다.
보살이 자비심을 가지면 한량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선행이 근본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고 단정적으로 경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선행의 근본은 자비심입니다. 그러니까 분별해서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렇게 해서 행위를 하는 것하고 그냥 따지고 묻지도 않고 행위를 했는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자비행이에요. 자비심은 진실에서 헛되지 않고 선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은 참 진리를 체득한 반야지혜이고 반야지혜는 그 온전함에서 일어나는 빛입니다. 진실한 생각은 꼭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다. 여래는 부처님이다, 라고 정의를 내렸어요.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심을 실천하면 자비심이 발현되면 바로 부처님 행을 하고 있는 거 에요. 여래의 행을 하고 있는 거 에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에 열반경의 ‘자비심은 곧 부처님이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는데요, 이웃 종교나 영성세계를 체득하고 나누는 성자들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마무리 하는 의미에서 이슬람의 잘 알려진 시인 루미의 ‘사랑의 연금술’이라는 시를 감사하시면서 오늘 법회 마무리 하겠습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 명상하는 자세로 들어주십시오. 생각 내려놓고 느낌으로 느껴보세요.
당신은 다른 세상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저 별들 너머에서 우주의 허공을 가로질러
초월과 순수,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져오셨습니다.
사랑의 정수이신 당신,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은 변화시킵니다.
소소한 근심, 힘겨움, 그리고 슬픔은 당신의 현존으로 사라집니다.
지배자에게나 서민에게나 농부에게나 왕에게나 당신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당신의 은총을 받으니 우리는 어쩔 줄 모릅니다.
당신으로 인해 모든 악은 선으로 변화됩니다.
당신은 최고의 연금술사입니다.
당신은 사람의 횃불을 밝힙니다. 땅과 하늘에 모든 존재, 가슴과 영혼에
당신의 사랑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가 합해집니다.
하나가 됩니다. 모든 대립이 하나가 됩니다.
모든 속된 것 들이 다시 신성해집니다.
❤ 미산스님, 자애미소명상법회 법문
(2015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