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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강의

INFO
제목 항순중생원과 보리심
등록일 2017-01-20

❤ 미산스님, 상도선원 하트스마일명상법회 법문

201596

 

 

  제가 이번에 ‘대승경론’들을 쭉 살피고 선어록을 보면서 ‘아, 대승불교는 역시 자비를 근간으로 성립된 전통이구나.’라는 확신을 다시 갖게 되었구요. 그럼 선불교는 다를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선불교가 표방은 깨달음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 그 내면 깊은 곳에서는 대자대비, 대상이 없는, 조건이 없는 큰 자비, 무연자비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우리들은 깨달음만 강조했지, 깨달음을 사회화, 깨달음을 실천 쪽, 자비 쪽은 왜 소홀하게 했는지 큰 반성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대승불교는 열반과 윤회가 둘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는 말을 쉽게 쉽게 합니다. ‘둘이 아닌 이 땅에서 실천이 되나?’가 관건이거든요. 이 불이 법문, 불이 중도 법문이 갖는 의미는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번에 수행지도를 하면서도 참여하신 여러분들로부터 크게 영감을 받았어요. 우리 사회에서는요,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더라구요. 특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데, 물질문명이 정말 발달되어 편리한 삶을 살고 있는 나라일수록, 사람들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스트레스 중에서 정말 해결하기 힘든 것이 사람과 사람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 속에서 친절을 학습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요? 엄청나죠.

 

이번에 몇 분이 오셨어요. 입 꼬리를 올려서 미소 지으세요. 그랬더니요, 나는 이거 직업적으로 7~8년 계속 해왔고, 사람들한테 이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킨 사람인데, "아니, 나한테 이 썩소를 (죄송합니다) 가장된 미소를 하라는 거예요?" 이, 반응이 딱 나와요. ‘자애 미소 명상’, ‘Heart Smile 미소’를 하신 분들은, 2박 3일 동안 끊임없이 주입하고, 공유하자고 하는 가르침이 ‘이 몸과 마음은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온전하다.’라는 거예요. ‘이미 지혜로 충만하고 자비로 무궁하다.’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리고 느낌을 통해서 느끼도록 하구요. 결국에 하나가 되도록. 그래서 그 자체였음을 늘 깨어서 바라보라고. 이것이 ‘자애 미소 명상’의 대전제이고, 이것을 믿거나 받아 드려지지 않으면 이것을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작하는 날, 한번 ‘이것을 한번 괜찮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하는 분들은 같이 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내가 온전치 않고, 부족하고, 항상 실수하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들어 보라고 했어요. 몇 분이나 손들었겠어요? 여기서, 한번 손들어 보세요. 한 분도 안 계시잖아요. 이번 명상에서는 한 분 계셨어요. 물론, 손 안 드신 분도 나중에 하는 과정에서 아, 정말 그런 자존감이 저, 바닥에 떨어져서 힘든 분들도 계셨어요. 그 원인이 뭘까? 봤더니 바로, 남들 앞에서 잘 보여야 되니까. 가장된 웃음을, 미소를 계속 훈련 받은 거예요. 학습된 긍정주의, 이것이 굉장히 사람을 힘들게 하고 결국에는 계속 누르고 누르고 누르고 참다가 터져서,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감정노동자라고 하는 말이 이제 보편화 되어가고 있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치유 방법을 제시해주려고 하는 움직임도 꽤 많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금 현재 고객을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 겉으로 미소 짓고 친절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속마음은 아니에요. 내가 지금 그 사람보다 못해서 굽실거리고 이렇게 해야 해? 집에 가면 그것이 너무 힘든 거예요. 교양이 떨어지는, 인성이 낮은 분들이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말을 아주 불쾌하게 하고, 하나의 밑의 사람처럼, 종처럼 다루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분들은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육을 한답니다. 그 교육이 다시 또 틀을 끊임없이 만드는 교육이에요. 표면에서 친절을 베푸는 교육만 하지, 내면에서 진정으로 친절을 베푸는 교육은 안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엄청나게 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상도선원에서 하는 ‘Heart Smile 명상’은 내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요. 자기 자존감을 충분히 일깨워주는 행법들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삼천 배를 여러 번, 평생 동안 하신 보살님이 오셨어요. 첫 날, 이것을 배우실 때 그랬대요. 아이고, 절이 무슨 수다스럽고, 이런 것을 하지? 하는 부정적인 마음이 확 올라왔대요. 삼천 배까지 했던 사람인데. 이튿날도 하구요. 그 다음날부터는 지금까지 했던 절과는 완전히 다른 질적인 의식의 변화가 온 거에요. 이 절을 할 때에는 극기 훈련의 의미도 많습니다. 삼천 배를 어떻게 해서든지 하고 나면, ‘내가 해냈다.’라는 성취감 때문에 또 하게 되요. 중독성도 있어요. 그 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엄청난 의미들이 있어요.

 

제가 이 절을 개발한 이유는, 지금 현대 사람들이 50, 60, 70대들이 했던 신앙심, 순수함,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순수하구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맹목적인 신앙심을, 10, 20, 30대들이 가질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아니라고 동의하실 거예요. 신체를 쓰는 것도 옛 분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1080배, 삼천 배 하라? 이것은 불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에요. 삼천배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좀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그것은 나중에, 이것을 잘 하고 있을 때, 최종과정으로 갈 수 있도록 보존하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편한 수행 방법들이 지금 개발되어야 해요. 33배를 하신 분들, 계속 하시면 몸에 대한 깨어있음이 계속 증장 될 것 같고, ‘Heart 무드라’와 ‘Smile’을 동시에 함으로써 생기는 따스하고 훈훈한 느낌이 자동으로 몸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같이 공감을 하시더라구요.

 

이것이 하나의 예인데, 이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자비를 잘 가꾸어가면, 감정노동을 하시는 분들이 표면적인 친절, 표면적인 사랑과 자비, 배려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깊어서, 심층에서 우리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비가 위쪽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해야 돼요. 왜 그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 가면, 임계점에서 정말 필요하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지 아세요? 우리의 본성을 누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본성을 두꺼운 장막으로 가리기 때문에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이 막을 제거해 버리면 표면과 아래가 심층이 둘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요.

 

어제는 제가 그분들에게 굉장히 조심스럽게, 아, 다른 분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분들을 배려하는 멘트를 따로 해보았거든요. 오늘 새벽에는 같이 해 보았어요. 당신들은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온전합니다. 따스함과 훈훈함으로 가득 차있고, 편안함과 고요함 속에서 늘 생동감 있는, 파릇파릇한 살아있는 맑고, 맑은 지혜와, 경쾌함과 자유로움이 있다.’ 이것을 믿고 한번 받아들이자. 이 명상을, 새벽 시간에 했어요. 회향할 때, 제가 확인을 했어요. 자기 스스로가 온전하지 않다고 하신 분 한 분, 특별히 여쭤봤습니다. 얼굴이 엄청 편안해지고, 미소가 가득해져서, ‘지금 이대로 정말 좋아요. 그냥. 이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될 것 같아요.’라는 전환이 하루 만에 일어나더라고요.

 

물론, 여러분은 뒷생각은 과연, 이 생각이 얼마나 갈까? 약발이 얼마나 갈까? 나도 다 해봤어. 좋아요. 약발이 얼마나 가느냐, 안 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일단 믿음이 생기면요, 믿음이라는 씨앗은 조건이 마련되면, 계속 다시 피어납니다. 그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 도반이에요. 끊임없이 그런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앞으로 상도선원의 불자들이, 저와 같이 수행하고 공부하는 도반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유마경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죠. 유마경은 무의법과 유의법이 둘이 아니다. 유의법이 뭐냐? 친절하기 위해서 틀을 딱 만들어서 교육을 받는 거예요. 당신네들, 백화점 매출을 올리려면 앞에서 웃고 친절하게 해야지 매출이 올라가지. 딱 그 목적이 규정되어 있죠. 이 틀에 맞게 너희들이 행동해야 해. 속에서 아무리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나의 본성인 자유로움을 규제하고 압박하더라도 참아야 해, 왜? 성공을 위해서. 매출을 위해서. 여기서 잘하면 네가 승진을 하잖아. 어제 오신 분들은 위에 가서 교육하시는 분들이에요. 참고 참아서 거기까지 올라가신 분들이에요. 그 부분과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친절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그 무위법의 특징 중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특징은 무엇이냐? 괴로움이라는 거예요. 갈등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요. ‘즐겁다’, ‘행복하다’는 것도 그 다음 순간 변해서 괴로움으로 되기 때문에 통틀어서 ‘두카’, ‘괴로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늘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울 수  밖에 없어요. 그 특징을 잘 알고 깨어서 거기에 머물 지 않으면, 유위법에 머물지 않으면, 그 자체가 무위법을 쓰고 있는 거예요. 무위법은 무엇이냐? 조작되지 않는 거예요. 조작해서 미소 짓지 않는 거예요. 조작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우러나서 베푸는 것이 무위법이에요.

 

무위법에서 유위법으로 나왔는데 무의에 뿌리를 둔 유위기 때문에 유의미해요. 대부분 무위법에 갇혀서, 무위법에 대한 인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 계속 무위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열반이나, 커다란 깨달음이나, 대자대비, 무연자비가 다 무위법 입장이에요. 이것과 그것이 다르지 않다는 관점을 유마거사는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마경의 말씀은 유의, 무위의 불이 중도적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선방에 다니시는 젊은 스님들, 주로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도 앞으로 공부 잘 해서 중생 교화를 하기 위해서 출가수행을 하는 것이지, 자기만 도를 깨달아서, 열반에 들어서 자기만 좋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열심히 정진하세요. 아주 중요한 것은 자비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요. 많은 스님들이, 한국의 젊은 스님들이, 스님. 제가 아직 확철대오를 못했는데 무슨 깨달음을 실천합니까? 자비행을 합니까? 확철대오를 한 이후에 중생제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답변을 하는 경우가 꽤 많아요. 저도 옛날에 그랬고. 그것이 당연한 말이에요.

 

장님이 길을 인도해 보세요. 엉뚱한 데로 가죠. 당연한 말인데. 그 말에 큰 허점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를 표방한다고 해놓고 불이 중도적 입장을 배제해 버리는 거예요. 자비심은요? 자비심은 행하는 만큼 보리심이 일어납니다. 행법을 통해서 직접 경험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대승전통에는 보현행원을 아주 강조한 대목들이 여럿 있습니다. 화엄경의 정수는 보현행원에 있습니다. 화엄경을 다 설해놓고, 다 편집해 놓고, 끝부분에 보현행원품과 선재동자 오십삼 선지식 친견하면서 보살행을 하며, 보리행을 완성하는 부분이 나와요. 이것이 화엄경의 두 송이의 꽃이에요. 이 부분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이미 정리해서 불보살님이 하고 계십니다.

 

보행행원품을 보면 아홉 번째 행원이 항순중생원입니다. 열 가지 행원이 있죠. 첫 번째, 부처님께 예배하고, 찬탄하고, 공양하고, 참회하고, 함께 기뻐하고, 청법하고, 청불하고,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아홉 번째 중생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수순하는 거에요. 열 번째는 모든 중생에게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수행을 마친 분들에게 같이 명상에서 했어요. 자비 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다 회향하자. 자기가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중생에게 저금을 해놓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갖다 쓰면 되요. 저금통장이 지금 꽉 차 있어요. 버리면 차게 돼 있어요.

 

항순중생원에 관한 보현행원품의 말씀에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항순중생원, 자비심의 유상이 어떤지를 여러분 함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붓다께서는 자비심을 본체로 삼기 때문에,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발하며, 보리심으로 등정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넓은 벌판 모래밭 가운데, 나무뿌리가 물을 빨아드려 줄기나 꽃, 열매를 무상하게 하는 것처럼, 생사광야의 보리수 왕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 중생을 뿌리로 삼고, 여러 불보살을 꽃과 열매로 삼으며,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하게 되면,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보살들이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면, 곧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리는 중생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저는 이 보현행원에 항순중생원 말씀에요. 제가 ‘Heart Smile 명상’을 현대인들에게 맞게 개발해서 나누는데 굉장히 중요한 이론적인 실제적인 바탕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붓다, 깨달은 분은 자비심을 본체로 삼는다. 왜냐하면? 중생들에 의해서 자비심이 나고, 자비심이 나면 보리심을 낼 수밖에 없어요. 중생들이 너무너무 힘든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어리석음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이미 무궁무진한 보배를 갖추고 있는데, 발견을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발견하게 해줄 수 있을까? 다시 또 자비심으로 보리심을 깨닫게 하는 마음을 내요. 누가? 내가. 이제 내가 빨리 깨달아야 해요. 저쪽을 완전히 깨닫게 해줘야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정진을 해야 하는 거예요. 자비심 때문에. 그럼 다시 또 무엇이 생깁니까? 보리심이 생깁니다. 정말 깨닫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해요. 등정각. 완전한 열매를 맺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꽃과 열매에요.